유관순열사의 영원한 소꿉친구 남동순 할머니의 항일독립운동

3.1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 유관순열사입니다. 1919년 항일독립운동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순사들에게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 돌아가신것으로 알고 있죠. 교과서에도 많이 나와서 다들 아실겁니다.

그러나 교과서에 실리지는 않았어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신 훌륭한 분들은 많이 있습니다. 남동순 할머니도 그런 분들 중 한분입니다.

남동순

남동순열사는 지난 2010년 4월3일 별세하기까지 젊어서는 대한독립을 위해 싸우고 해방후에는 전쟁고아들을 돌보다 돌아가셨죠. 교과서에 없어서 많이 알려지지 못했지만 저라도 이 공간에 남동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적어보려고 합니다.

유관순

관순이와 난 여섯 살 적부터 소꿉친구지. 관순이는 심령이 좋고 사상이 좋았어. 내가 은연중에 일본말이 튀어나오면 ‘일본말을 잘하니 너느 친일파다’ 하면서 혼을 내. 그럼 내가 ‘동무끼린데 좀 봐주라’며 이야길 나눴지.

이화학당에 같이 다닐 땐 사람들이 ‘두순이’라고 불렀어. 관순이와 내가(동순)이가 워낙 친하고 같이 다니니까 사람들이 두순이라고 부른거지.

3.1운동은 누구 제안으로 참여하신거에요?

일본을 향한 분노에 누가 먼저랄게 어딨어. 이 감정이 순식간에 퍼져 학교에 휴교령이 내리고 학생들은 거리로 나갔지. 나랑 관순이는 남산으로 올라갔다가 장충단을 거쳐 종로로 갔어. 그런데 어떤 남자가 그래. 둘이 붙어다니지 말고 하나는 고향(천안)으로 내려가 만세를 부르라고.

이후 유관순은 천안으로 내려가서 청주, 진천 등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모으다가 일본 헌병에게 잡혀 공주 감옥으로 넣고 병천 유관순 집은 불질러 태워버립니다.

유관순

난 만세를 부르다 서대문 형무소에 끌려가 일본놈들에게 매섭게 맞았지. 같이 운동한 사람들 이름을 대라고 콧구멍에 고춧가루물을 들이부어도 절대 안댔어. 그 죽일 놈들이 내가 이름을 대도 때리고 안 대도 때릴게 뻔하거든.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다하고 이를 악물었지.

열아홉이면 얼마나 예쁠 때야. 관순이도 잡혔지. 그런데 사지가 찢어지도록 고문을 당하고 죽었어. 내가 살아남은건 관순이가 못다한 일 하라고 하늘이 내리신 명이야.

남동순

1975년 창설한 예비군들이 봉사활동하는 모습. 서있는 사람 중 왼쪽에서 두번째 모자쓰신 분이 남동순 할머니

이후 남동순할머니는 감옥에서 나온뒤 교복을 입은 채로 신익희 선생이 결성한 7인의 결사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또 광복 이후에는 전쟁고아들을 돌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워낙 강단이 있으셨던건지 남동순 할머니는 오랫동안 정정하시다가 지난 201년에 별세를 하게 되는데요. 그때 연세가 107세입니다.

어려서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고초를 겪으시고 해방 후에도 자신보다는 전쟁고아들을 돌보며 살아가시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보상을 받지 못해도 묵묵히 자신이 떳떳하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셨던 남동순 할머니를 존경합니다.

서울역, 남대문 시장에 전라도 경상도에서 올라온 아이들이 바글바글했어. 한번은 미군들이 전쟁통에 총 맞은 아이들을 헬리콥터로 실어다가 남산에 수북이 데려다놨는데 아무도 거들떠 보질 않는거야. 화가나서 ‘한국 사람들은 피도 눈물도 없느냐’는 팻말을 세워놨었지.

아이들을 키우며 대학은 4명밖에 못 갔지만, 대령도 나오고 선생도 나왔어. 딸들 시집 갈 때는 내가 친어머니인 줄 알고 사돈들이 ‘이리 예쁘게 잘 길러줘 고맙다’고 했어. 남편 없고 자식 없다고 사랃들은 날 불쌍하게 볼는지 모르지만 난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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